맨위로가기

이창근 (1900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창근은 1900년 출생하여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관료로 활동했으며, 충청북도지사와 경상북도지사를 역임했다. 그는 친일 행위로 비판받았으며, 광복 후 화신무역 상무 등을 지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송치되었으나 처벌받지 못했고,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제강점기의 경상북도지사 - 김대우 (1900년)
    김대우는 일제강점기 관료이며 해방 및 정부 수립 이후의 활동 기록은 미상이다.
  • 일제강점기의 경상북도지사 - 고타키 모토이
    고타키 모토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주요 관료로서, 다양한 직책을 거쳐 경상북도 지사, 내무국장, 식산국장을 지냈으나,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이 있다.
  • 기독교인 - 척 피니
    척 피니는 면세 쇼핑 그룹 DFS의 공동 창립자이자 "살아있는 동안 기부" 철학을 실천한 아일랜드계 미국인 자선가로, 애틀랜틱 자선재단을 통해 교육, 과학, 의료, 인권 등 다양한 분야에 익명으로 거액을 기부했다.
  • 기독교인 - 변중석
    변중석은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의 부인으로, 7남 1녀를 낳고 남편의 사업을 내조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투병 생활 끝에 86세로 사망했다.
  • 일제강점기의 충청북도지사 - 장헌식
    장헌식은 대한제국 관료와 조선총독부 사무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며 친일 행위를 했고, 청주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해방 후 공금횡령 혐의로 처벌받았으며,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충청북도지사 - 유만겸
    유만겸은 유길준의 장남으로, 조선총독부 관료, 문경군수, 충청북도 지사 등을 역임했으며, 친일 행위로 인해 친일파 명단에 수록되었다.
이창근 (1900년)
기본 정보
추가 정보
참고 문헌제국비밀탐정사, 1942, 조선86쪽

2. 생애

이창근은 1900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이윤모(李潤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23년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1925년 조선총독부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유학 시절, 부인 이기영(李基榮)은 시모노세키 시 매광여학원(梅光女學院)을 졸업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와 각 도의 주요 직책을 거치며 일제의 식민 통치와 중일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했다. 광복 후에는 화신무역회사, 경찰후원회 등에서 활동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송치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1957년까지 생존이 확인되었다.

2. 1. 일제강점기 활동

이윤모(李潤模)의 아들이며, 부인 이기영(李基榮)은 일본 시모노세키시 매광여학원(梅光女學院)을 졸업했다. 1923년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 속(屬)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충청남도와 조선총독부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 1927년 2월: 충청남도 내무부 이사관
  • 1927년 3월: 충청남도 내무부 산업과장
  • 1928년 4월: 충청남도 내무부 학무과장
  • 1930년 7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종교과장


1928년 11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고, 이후 함경남도, 평양, 경상북도, 경기도 등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

  • 1932년 2월: 함경남도 재무부장
  • 1934년 5월: 평양세무감독국 세무부장
  • 1936년 5월: 경상북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
  • 1937년 9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 수여
  • 1939년 5월: 경기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
  • 1940년 1월: 경기도 임금위원회 위원


경상북도 및 경기도 산업부장 겸 도 참여관·사무관 재직 시절 군용물자 공출 및 조달, 물자 조정 및 물가 상승 억제 등에 주력하는 한편,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총독부의 시정방침을 선전하는 글을 기고했다.

여러 단체의 주요 직책을 겸임하며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 경상북도농회장 (1936년 6월 ~ 1939년 5월)
  • 경상북도지방미곡통제조합연합회장 (1936년 11월 ~ 1939년 5월)
  • 경상북도 방공위원회 위원 (1938년 3월)
  • 경기도지방미곡통제조합연합회장 (1939년 5월)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1939년 5월)
  • 경기도 농회 회장 (1939년 5월 ~ 1942년 1월)
  • 경기도 유도연합회 부회장 (1939년 11월)
  • 1941년 9월 13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 수여
  • 1942년 5월 12일: 훈4등 서보장 수여


1942년 10월 23일 충청북도지사로 임명되었고, 1944년 8월 17일부터 1945년 6월 16일까지 경상북도지사를 역임했다.

  • 국민총력충청북도연맹 회장 (1942년 10월)
  • 충청북도 농회장 (1943년 10월)
  •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회장 (1944년 8월)
  • 경상북도 소득심사위원회 회장 (1945년 4월)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지사 부문, 도 참여관 부문,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2. 광복 이후

1946년 화신무역 주식회사 상무 겸 이사, 경찰후원회 부회장, 상호무역회사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다.[3] 1949년 8월 2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송치되기도 했다.[3]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고, 1957년에 생존이 확인되었다.[3]

3. 친일반민족행위 규정

이창근은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지사, 도 참여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3] 2004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1]

참조

[1] 백과사전 이창근(李昌根) http://encykorea.aks[...]
[2] 기타 이창근 ( 李昌根 ) http://db.history.go[...]
[3] 뉴스 우선 337명 판명 북한피랍인사중생존자 동아일보 1957-11-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